올바르지 않다고 여기는 누군가의 행동에 사람들은 날카롭게 반응하곤 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거슬리는 그 무언가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실제로 잘 들여다보면 타인의 그러한 허물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면 그 업으로 인해 화를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허물을 마치 자신의 허물인 것 마냥 참지 못한다.
남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내가 너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타인의 허물을 내가 벗겨줘야 한다는 강박을 낳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허물은 타인의 것. 스스로 변화를 원하고 문제점을 진단해줄 것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타인의 허물은 그의 허물로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순리에 합당하다.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데로 지나가게 하면 된다. 타인의 허물은 그저 지나가게, 그리고 나에게 약간의 피해를 주더라도 최대한 지나가게 하여 덜 피해를 입도록 흘려보내는 것이 현명한 이의 처신일 것.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바꾼 현인들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승되다보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신화의 컴플렉스에 잡혀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써 타인을 바꾸려 하지 마라. 그것이 남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인 이상.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당신의 삶의 여유와 품격을 결정짓는다.
-----------------------------
타인의 허물에 관대할 수 있는 용기
우리는 살아가며 종종 누군가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도덕적 기준을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 혹은 자신의 가치관과 어긋난 행동을 볼 때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마치 세상을 조금 더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처럼, 타인의 허물을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욕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타인의 행동이 우리 삶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잘못된 태도와 선택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게 되는 건, 대부분 그 당사자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신의 문제인 듯, 견디지 못하고 개입하려 한다.
도덕적 개입의 오만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허물을 '수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때가 많다.
그 바탕에는 종종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나는 너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옳은 사람이다.”
그 생각이 타인을 교정하고 지적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결국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형태의 오만을 만들어낸다.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 역시,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 중 하나로 "타인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비합리적 신념"을 꼽는다. 그는 이것을 “musturbation”이라 표현했다.
“그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해.”
라는 강박적인 사고가 우리 스스로의 정서적 고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누구의 허물인가
타인의 허물은 타인의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도움을 청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조심스럽게 조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요청이 없다면, 그 허물은 마땅히 그 사람의 삶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도덕적 수용의 순리이며, 관계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다.
**스피노자(Spinoza)**는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물은 그 존재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타인의 행동 역시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시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 조건을 갖는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변화는 그 사람의 몫이다.
흘러가게 두는 지혜
흔히 말하듯,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게 두면 된다. 타인의 허물에 의해 약간의 불편이나 손해를 입을 수는 있겠지만, 그 모든 상황에 에너지를 들여 개입하는 것이 반드시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을 적절히 흘려보내는 것, 그저 '작은 파도'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기 삶을 지키는 성숙한 자세다.
우리는 위대한 성인이나 현인의 일화를 접하며, ‘타인을 변화시켜 구원한 이야기’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신화이자 예외적 사례일 뿐, 현실의 대부분은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바꾸려 애쓰지 않고도 평온을 유지하는 것, 그 평온 안에서 자신의 품격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토대다.
결론: 수용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여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곧 자신에 대한 존중의 반영이다.
자신에게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결점을 불편한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의 허물이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을 굳이 고치려 들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숙함이며, 삶의 깊이다.
'보통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남매의 막내 딸 (3) | 2024.07.14 |
---|---|
나의 사계절 (1) | 2024.07.06 |
빈자리 (2) | 2024.07.03 |
그 마지막이 생각난다 (0) | 2024.07.03 |
가끔 읽어보면 좋은 삶의 지침 (2) | 202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