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에게 엄마는 하나의 몸이다. 그것은 행복이자 안전이자 쾌락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와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불행이자 공포 불안이다. 불안으로부터 되찾은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 다시 쾌락과 안도감을 안긴다.
그리고 우연적으로 보이던 분리가 주자발생하면서 피할 수 없는 필연임을 깨닫는 순간, 아이는 자신(어머니를 포함한)으로부터 분리된 제3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계속 어머니와 한 몸인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사그라 들지 않는데, 나중에는 이 욕망이 장난감이라든가 TV 속 만화 캐릭터를 향하게 되면서 욕망이 세분화 된다.
사실 아이의 일생은 이러한 불안과 불안희 해소, 공포와 안도감, 쾌락으로부터의 분리와 결합의 반복이다. 이것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발생하는 인생의 굴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된다. 고난과 노력과 성취. 그 후에 다시 찾아오는 고난과 노력과 성취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면 그 다음에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욕망을 멸각하면서 이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게 바로 불교의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아이에게 세상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분절된 공간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였다가 조금씩 희미하게 경계선이 생기다가 언어를 습득하면서 세상과 자신을 분절하여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력이다. 주변의 환경과 자신을 연결할 수 있는 상상력이 오히려 자신과 주변 세상을 분리하면서부터는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언어를 습득해야 하고 질서화와 구분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상상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간혹 예술의 영역에서 '아이의 눈'을 필요로 하는 것도 그러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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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몸, 잃어버린 상상력 ― 라캉과 프로이트를 통해 본 성장의 역설
태초의 인간에게 세상은 하나였다. 엄마의 품 안에서 아이는 경계 없는 세계를 경험한다. 그에게 엄마는 세상이자 몸이자 자기 자신이었다. 이 경계 없음은 쾌락과 안도감의 총체로서, 아직 ‘나’와 ‘너’가 분리되지 않은, 라캉이 말한 *상상계(the Imaginary)*의 시기다.
그러나 이 통합된 세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우연처럼 보이던 단절이 발생한다. 엄마의 부재, 배고픔, 낯선 환경 등 외부 세계가 침투하면서 아이는 이전의 안온함으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의 물리적·심리적 분리가 시작되며 불안과 공포가 엄습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갈망하고, 되찾고자 애쓴다. 이 반복되는 결핍과 충족의 순환은 바로 프로이트가 말한 *욕동(Trieb)*의 리듬과 맞닿아 있다.
이때 중요한 전환점이 등장한다. ‘나’와 ‘엄마’는 다르다는 인식, 나아가 ‘나’와 ‘세상’의 경계가 있다는 자각이다. 라캉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것은 *거울 단계(the mirror stage)*에 해당하며,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나’로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더 이상 전능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는 주체의 탄생이며, 상상계에서 상징계(Symboic)로의 이행이다.
이후 아이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언어는 세계를 분절하는 도구다. 모든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것은 점차 언어의 체계로 포섭된다. 이제 어머니는 ‘엄마’라는 기호로 대체되고, 세계는 명명되고 구획된 사물들의 총합으로 바뀐다. 이는 질서의 시작이자 동시에 상상력의 종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초자아(Superego)*의 형성이며, 욕망은 금기와 규율의 틀 안에서 방향을 달리한다.
하지만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라고 말한다. 분리된 주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그 갈망은 언제나 완전한 충족에 도달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몸, 하나였던 세계, 말 이전의 상상력은 실재계(the Real)로 남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속에서 살아간다.
성장, 성숙, 사회화란 결국 이 영원한 결핍을 수용하고,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 살아가는 일이다. 고난과 노력, 성취의 반복. 그 모든 과정은 단지 욕망의 다음 대상을 찾아가는 순환 구조일 뿐이다. 그리고 때때로 인간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불교는 이를 '욕망의 소멸'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욕망일지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품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존재로 느낄 수 있었던 감각, 말 이전의 상상력, 주체 이전의 평화다. 아이의 눈으로 본 세계는 나와 사물, 나와 타자, 나와 시간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그러나 언어의 세계로 들어온 이상, 우리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예술, 놀이, 혹은 사랑의 순간에 잠시 그 세계를 흉내 낼 수는 있다. 예술가가 ‘아이의 눈’을 되찾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과 결핍으로 짜인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잃어버린 몸을 기억하고, 상상력을 회복하며, 다시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려 한다.
결국 인간의 일생은, 잃어버린 세계를 향한 끝없는 순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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