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5년 이래 소련의 막강한 군대는 마르크스주의 정권들 간의 민족주의적 무력분쟁을 차단했다. 이는 소련이라는 이름이 민족성을 거부하는 특징을 가진 것처럼, 소련이 민족에 선행하는 19세기 왕조 국가의 유산 상속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래된 민족들은 그 국경안에서 하부의 민족주의를 가지며 '하부'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를 바라는 이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실로 민족은 우리 시대의 정치에서 가장 보편성으로 정당성을 띠는 가치이다. 민족성은 특정한 종류의 문화적 인공물들이다. 이러한 인공물들이 심원한 감정적 정당성을 행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교육, 인쇄물, 신화 등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이지 초기부터 존재하던 실존의 공동체 단위가 아니었다.
민족주의에는 세 가지 역설이 있다. 첫째 역사가가 보기에 민족들은 근대의 산물이지만, 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근대 세계에서는 누구나 민족성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한다는 보편성을 띠고 있으나 그 발현은 특유성을 띠고 있다. 셋째, 민족주의의 정치적 힘은 그 이론적 철학적 근거의 빈곤에 비하면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것이다.
민족은 상상된 것이다.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조차도 같은 민족의 대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각자의 가슴속에는 그들과의 교감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먼저 민족은 제한적인 것으로 상상된다.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가 있으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또한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에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민족은 언제나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토록 제한적인 상상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형제애가 있기에 가능했다. 무엇이 이러한 동질감과 형제애가 가능하게 했을까? 해답의 출발점은 민족주의의 문화적 뿌리에 있다.
민족에도 경계가 있고 경계로 인해 강화된다. 경계 내부에는 강한 결속력과 형제애가 존재한다.
2. 문화적 뿌리들
전통적인 종교적 세계관의 대단한 장점은 그들이 인간의 삶의 연속성과 우연성에 대해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는 수천 년이 넘는 기간동안 여러 사회적 형태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는 질병 노화 죽음 등 인간의 고통에 대해 그들이 상상력 넘치는 대답을 해왔기 때문이다. 종교적 사고는 불멸에 대한 모호한 암시에도, 보통은 숙명을 연속성(업보, 원죄 등)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대응했고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 사이의 연계를 통해 세상을 설명했다.
종교는 삶의 거부할 수 없는 여러문제(죽음과 가난)에 대한 해답을 삶의 연속성으로 제시했다.
18세기 서유럽이 민족주의를 열어갔을 무렵, 종교적 사고방식은 황혼기이기도 했다. 종교적 신앙은 수그러들었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천국의 해체로 이제 숙명은 자의적인 것이 되었다. 이에 숙명을 연속적인 것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다른 관념이 필요했고 민족의 개념보다 이 목적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민족은 언제나 과거로부터 불거져나와 무한한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 민족주의의 마술이다. 그렇다고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종교를 100%대체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민족주의가 탄생한 큰 문화적 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탄생 전 큰 축을 이루고 있던 문화적 체계는 크게 종교 공동체와 왕조의 영지 두 가지가 있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준거틀로 여겨졌다.
종교가 힘을 잃어갈 무렵 삶의 연속성을 대체할 대안으로 민족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거대한 종교 공동체는 대체로 신성한 언어 및 문자로 된 경전이라는 매개를 통해 상상이 가능한 것이었다. 쿠란의 신성한 텍스트는 오로지 고전 아랍어로만 존재했다. 한자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을 이끌어낸 문명 사회의 핵심요소였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졌고, 일부 식자층만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문자는 소리가 아니라 기호를 통해 종교 공동체를 탄생시켰고, 이 공동체들은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지상을 초월하는 권력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기에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이들이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와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언어에 독특한 신성함이 있다는 확신과 그리하여 생겨난 회원권에 대한 관념이다.(한국과 일본은 한자의 회원권이라는 것처럼)
종교 공동체는 경전이라는 진리하에 단일화된 계서제적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경전은 특정 문자로 표현되며 특정문자 그 자체가 신성함을 나타냈다.
이러한 신성한 언어는 종교적 공동체들이 상상되는 매개였으며, 특히 비임의적이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즉 특정 동일한 관념을 한국어로든 일본어로든 표현할 수 있는 현대어의 자의성과 달리 고대 종교어(아랍어, 한자, 라틴어)등은 실재 그 자체의 발산이라고 본 것이다. 말그대로 진리의 실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한 진리의 기호로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언어로서 개종에의 충동을 유발한다. 이러한 개종은 종교의 교리 수용이라는 개념이 아닌, 연금술적인(*화학변화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고 보임) 흡수(만주족의 한족화)를 뜻한다. 그래서 잉글랜드인이 교황이되고 만주인이 천자가 될 수 있었다. 신성한 언어를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은 신을 정점으로 한 우주론적인 위계질서에서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사회집단은 근본적으로 계서적이고 중심 지향적인 것이었지 수평적이고 경제 지향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상상된 위대한 공동체들이 지닌 모든 위엄과 권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기점으로 한 응집력은 중세 후기 이래로 꾸준히 시들어갔다. 시퇴의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신성한 언어는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개였기에 언어의 성격이나 권력이 변화면 그에 영향을 받아 종교 공동체의 응집력도 변할 수 있게 된다.
첫째, 비유럽 세계에 대한 탐험의 효과로서 인간 생활의 가능한 형태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넓히는 결과가 유럽에 나타났다. 둘째, 신성한 언어 그 자체가 서서히 격하되었다는 점이다. 인쇄자본주의로 인해 라틴어를 제외한 사용 인구수가 많은 언어로 번역되는 책들이 증가했고 라틴어는 점차 인텔리의 언어로서의 기능을 멈추었다. 라틴어의 추락은 오래된 신성한 언어들로 통합되었던 신성한 공동체들이 서서히 파편화, 다원화, 영토화되는 더 큰 과정의 본보기 였다.
신성한 라틴어의 격하와 인쇄자본주의는 종교적 공동체 붕괴의 시작이었다.
왕권의 정당성은 신에게서 비롯되며, 주민들은 신민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권이 미치는 영역은 군데군데 뚫려있었으며 주권의 영역은 모르는 사이에 서로 겹쳐 들어갔다. 왕조의 결혼으로 다양한 인구 집단을 자신의 왕조에 모아놓은 합스부르크가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군주의 자동적인 정당성은 1649년 찰스 스튜어트의 목이 잘리면서 그리고 평민 출신의 호국경 크롬웰이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1789년 혁명이 벌어지면서 쇠퇴하게 된다.
신성한 공동체와 언어, 혈통이 쇠퇴하면서 그 밑에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민족에 대한 사고가 가능해졌다. 그 중 하나가 시간을 파악하는 방식의 변화다. 중세 기독교의 사고방식에는 원인과 결과의 끝없은 사슬이라든가, 과거와 현재의 급격한 단절이라는 역사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cf) 근대, 현대라는 개념도 비교적 근래에 도입된 개념으로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느낄 수 있었던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다.] 블로크에 의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자신들이 틀림없이 시간의 끝에 거의 다 다다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떤 전자의 사건이 후자의 사건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후자가 전자를 실현하게 된다면 시간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두 사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 데 이 관계를 수평적 차원에서 이성에 의해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오직 두 사건이 신의 섭리에 의해 수직적으로 연결되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지상의 사건들은 사슬을 잇는 고리가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미래에 실현될 어떤 것이다. 이러한 동시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선 관념으로 이러한 중세적 개념을 대체하게 된것은 - 벤야민에 의하면 - 비어있는 동질적 시간이라는 관념으로, 시간적 동시 발생으로 특정지어지는 것 그리고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되는 것이다. 이 전환이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소설과 신문이라는 두 가지 상상 형식의 구조를 고찰해보면 답을 구할 수 있다.
중세인들의 동시성을 대체한 개념은 비어있는 동질적 시간이다. 달력과 시계에 의해 사람들의 시간은 동질화 되었으며 이는 역사를 단일한 시간축에서 선후관계를 파악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시간축에서 움직이는 주체에 민족만큼 잘 어울리는 것이 없다. 동일한 시간이란 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민족이라는 상상에 있어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근대 이후 소설들의 전형적인 구조는 등장인물의 모든 행위가 시계와 달력상에서 똑같은 시간에 행해진다는 것(시점에 따라 어느 행위가 먼저 오고 어느 행위가 나중에 오는 지 구분할 수 있음)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을 통해 달력을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유기체라는 관념은 민족이라는 관념과 딱 들어맞는 동형으로, 민족역시 역사를 타고 내려가며 또는 올라가며 움직이는 견고한 공동체로 인식된다. 일례로 한 명이 미국인이 나머지 수억명의 미국인들 대부분을 만날 일이 없음에도 그들에게는 꾸준히 이름없이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는 완벽한 확신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소설가들이 주인공을 사회에 위치시켜 소설가-독자들의 시간에 그리고 그들에게 친숙한 풍경에 던져놓아 그들에 대해 청중과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이 바로 비어있는 동질적 시간이라는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만날 수도 없지만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날짜의 신문기사에 나오는 여러 뉴스들은 대부분 독립적으로 발생하며, 행위자들은 서로에 대해 인지하지 않고 있다. 이들을 포함하고 병치하는 방식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그들 사이의 연계가 상상되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상상된 연계는 단순히 달력상의 일치라는 원천에서, 수천만명의 독자들이 동시에 그 기사를 읽음으로써 발생하는 상상력이라는 원천에서 발생한다.
특정한 경전의 언어가 존재론적 진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진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제공한다는 생각, 사회란 당연히 높이 있는 중심 즉 다른 인격들과 구분되는 인격이자 어떤 우주론적인 섭리로써 통치하는 왕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아래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간성에 대한 관념- 이 관념들이 결합됨으로써 인간의 삶은 필연성에 확고하게 뿌리내렸으며 숙명(특히 죽음)에 일정한 의미가 주어졌고, 숙명으로부터 구원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이 세가지가 지배력을 잃었을 때 민족을 상상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역사적으로 떠올랐다.
3. 민족의식의 기원
민족주의의 발현에는 자본주의와 인쇄산업의 발전이 결정적이었다. 서적판매상들은 가능한한 많은 수의 동시대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을 추구했고, 최초의 시장은 라틴어 독자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고 라틴어 시장이 포화되자 인쇄업자들은 일상어로 싸구려 판본을 유통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라틴어의 성격이 극소수만이 해독할 수 있게 변질됨에 따라(라틴어가 선택된 소수의 비밀이었던 이유는 텍스트로서의 지위때문이었다) 이제 라틴어는 해독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효과로(애초에 종교개혁이 인쇄자본주의로 인해 성공했다) 독일어로 출판된 책의 양이 급증했으며 대중 독자층이 등장하고 대중문학이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되고 있던 일상어 인쇄시장의 팽창을 이용할 줄 알던 개신교는 인쇄자본주의와 동맹을 맺고 대규모의 새로운 독자층(라틴어를 거의 모르던 여성과 상인 포함)을 창출했고 이들을 정치적 종교적 목적에 동원했다. 또한 자리를 잘 잡은 왕정에서도 행정적 중앙집권화의 도구로서 일상어를 천천히, 지리적으로 고르지 않게 보급했으며 이는 일상어의 경계를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사례를 들면 노르만족 정복이전 앵글로색슨어를 쓰다가 그 다음 150년간 모든 궁정문서가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1200년과 1350년 사이에 라틴어는 노르만 프랑스어로 대체되었고, 이 언어와 앵글로 색슨어의 융합이 일어나 초기 영어를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언어는 1362년 이후 법정의 언어이자 의회의 개회사로 쓰이는 언어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잉글랜드에 종속된 인구 중 상당수가 이 언어를 모르고 있었다(웨일스, 스코틀랜드인 등) 또한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1세가 비예르코트레 칙령을 반포한 1539년에야 프랑스어가 공식언어가 되었고, 합스부르크가 치하에서는 라틴어가 19세기 명백을 유지했으며, 18세기 로마노프 궁정의 언어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였다. 근대 초기 이러한 언어의 선택은 언어 민족주의의 흥기를 위한 정책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행정언어가 다양한 신민의 집단에 체계적으로 강제된 적은 없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어, 영어 등의 지위 격상은 라틴어의 몰락과 기독교 세계의 상상된 공동체가 타락하는데 나름 기여를 했다.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가능하게 했던 것은 자본주의와 인쇄기술, 그리고 인간의 언어적 다양성이라는 숙명 간의 상호작용 이었다. 구어의 다양성은 엄청났으나 이 다양한 개별어들은 일정한 한계안에서 조립해서 수적으로 훨씬 적은 활자어들로 만들 수 있었는데, 소리에 대한 기호체계는 무엇이든 자의적이라는 점이 그 조립과정을 용이하게 했다. 활자어들은 일상어들을 '조립'하는데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복무했으며 민족주의 의식의 주춧돌을 세가 지 방식으로 놓았다.
첫째 구어 일상어의 위에 교환과 커뮤니케이션의 통일된 장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대화로는 이해가 힘들더라도 활자와 종이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범위한에서 특정한 언어의 장(field) 안에 같이 있다는 동류의식을 만들어 냈다. 이는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의 맹아를 형성했다.
둘째, 고대로부터 전래되는 민족관념의 이미지를 쌓는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인쇄된 책은 영구적 형태를 간직했고 과거처럼 필사를 통해 개인화, 현대화 되는 일이 없었다. 즉 과거 선조들의 생각을 오늘날에도 동일한 체계로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민족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요인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셋째, 인쇄자본주의는 권력의 일상어를 만들어냈다. 특정한 사투리는 표준화 과정을 통해 배제될 수 밖에 없었으며 표준문자와 언어는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하여 주변부를 자신에게 동화시켰다.
활자어들의 고정과 각종 구어들의 지위 분화는 자의식 없이 일어난 과정으로 자본주의와 기술, 인간의 언어적 다양성의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오늘날에도 터키의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아타튀르크는 로마자화를 강제했으며, 소비에트는 먼저 로마자 의무화를 그리고 1930년대에는 소탈린의 러시아화라는 맥락에서 키릴 문자의 의무화를 추진했다. 거의 모든 민족국가들이 '민족 활자어'를 보유하고 있지만, 일부 민족은 극 소수만이 대화에서나 문서에서 민족어를 이용한다. 영연방의 민족국가들은 영어라는 공용어를 사용하지만 영국의 식민지의 경우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토착어와 영어 동시에 사용). 즉 현대 민족국가들의 형태는 결코 특정 활자어가 명확히 도달하는 범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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