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이야기

완벽함에 대해서

써머23 2025. 1. 2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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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이데아를 건설한 이후 부터였던가, 많은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신이 인간의 탈을 벗고 하늘로 돌아간 로마시대에도 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상적인 세계와 정답이 있었다. 또한 이러한 사고 방식은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상을 꿈꾸고 그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19세기가 넘어서져 이상을 추구하던 방식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광기, 소수취향 등 비이성적으로 주목받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등장한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것들이, 비이성과 이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꾼 점보다, 인간과 세상이 애초에 질서를 기반으로 이상적인 상태를 기반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하는 점에 매료되었다. (포스트 모던의 시작점 중 하나가 프로이드의 정신병리학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완벽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그러한 실망감과 좌절보다 애초에 이상적인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의 본성이 억눌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세상은 질서롭지 않다. 인간은 혼란과 카오스로 가득찬 세계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도시를 만들고 도구를 만들어 문명을 만들었을 뿐이다. 사람도 비슷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무질서한 존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사회화 시키고 내면의 정신에 질서를 부여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무질서로의 회귀본능은 생각보다 매우 어마어마하다.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 억압적일수록 억눌린 회귀본능이 더 격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음악, 체육, 미술활동이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언가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싶고, 소리를 지르고 싶고, 움직이고 남을 쓰러뜨리려는 내면의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왜 태권도장이 인기가 많은 지 생각해보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에 대한 관대한 시선에 있다. 우리는 애초에 완벽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태어남자체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무질서와 혼란 절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가득한 자연의. 그래서 스스로에게 너무 완벽함을 바라지 말자. 애초에 이상세계라는 건 없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이론과 환상일 뿐. 수많은 유토피아를 설계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어떤 설계도 실현되지는 않았고, 혹 실현됐는 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사람도 그렇다.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도덕 정도만 잘 지켜도 훌륭한 인생이다. 당시의 언행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지 말고, 그러한 것을 당신에게 바라는 이들을 멀리하라. 오늘도 수고한 당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시원하게 한 번 소리를 질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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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상(理想)의 유령과 그 유산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 세계의 본질은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완전한 형상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사유는 이후 철학, 종교, 정치, 예술의 뼈대를 이루었다. 특히 '이상적인 인간상'이라는 개념은 문명 전반에 깊게 스며들어, 완전함을 추구하는 문화적 집착을 낳았다. 신의 질서 아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다듬어야 했고, 결핍은 죄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질문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정말 완벽을 향해 태어난 존재인가?"

제2장: 무질서의 발견 - 포스트모던과 혼돈의 재해석

19세기 후반, 인간은 점차 이성의 울타리 밖에 존재하는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광기, 욕망, 일탈, 소수의 감각적 경험들. 이것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비이성의 풍경'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기존의 해석 틀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본래부터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억압,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열어젖히며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우리는 질서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무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을 품고 있다.

제3장: 억압된 자연으로서의 인간

아이를 보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아이는 무질서 그 자체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움직이고 소리치며, 충동에 따라 살아간다. 사회화란 이 무질서를 통제 가능한 형태로 조정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통제는 억압을 동반하고, 억압은 언제나 반작용을 낳는다. 현대인은 이 억압의 회귀 본능을 예술과 운동을 통해 해소한다. 체육과 예술은 단지 여가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가진 카오스를 건강하게 방출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다. 교육, 규범, 문명은 자연을 다듬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원시적 에너지가 웅크리고 있다.

제4장: 완벽하지 않음의 윤리

우리는 완벽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자연은 정교하지 않으며, 인간도 그렇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상을 강요한다. 더 나은 인간, 더 똑똑한 사람, 더 성숙한 어른. 그러나 '더 나음'은 기준이 아닌 욕망일 뿐이다. 유토피아는 설계되었으나 실현된 적 없다. 인간 역시 이론이 아니며, 환상이 아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완벽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안고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제5장: 인간 이해의 온도, 그리고 자기 연민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기 이해와 자기 연민이다. 자기 연민은 게으름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리듬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다. 오늘 하루 실수했더라도, 완벽하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따뜻해질 수 있다.

에필로그: 불완전한 존재에게 보내는 박수

수많은 철학자들이 완전함을 설계했고, 수많은 제도와 종교가 그것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그 결핍 속에서 우리는 노래하고, 그리며, 사랑하고, 고통받는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그러니 오늘도 스스로를 채근하지 말고, 소리쳐보자. "나는 이대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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