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심연은 있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던 국회의원이 사과기자회견을 열더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제 주변 모든 분들이 아실겁니다." 오랫동안 이상 세계를 갈망하며 추구해온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할 때도 심각한 이상향에 빠져있는 듯 하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실수한 것뿐" 이라는 변명으로 무마시키려고 한다. 반대로 타인의 실수는 "너는 원래 그런사람"이라며 쉽게 단정지으니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동양에서는 공자가 논어에서 '성인군자'를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철인'을 모델로 삼아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했고 이는 다른 문화권을 찾아봐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사람 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사회의 교육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완성된 성숙한 인격체에 도달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세상과 사람 모두 완벽하지도 질서정연하지도 않다. 오히려 카오스, 즉 혼돈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게 최근 학계(심리학, 물리학)의 평이다. 어린 아이를 양육해본 부모라면 생명체의 본질이 혼돈과 자연상태 그 자체에 있음을 체득하게 된다. 잘 사회화된 인간은 교육적 산물일 뿐 애초에 인간의 본성 자체가 질서정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인지가 가져올 부조화이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외도를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다르게 생각하는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현명해 보이는가.
A : 나는 절대 외도 같은 건 하지 않을거야. 그것은 올바르지 않으니까.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B :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고 때로는 외도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왜 외도를 해서 안되는 지 더 고민해보고 성찰해봐야겠어.
A는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가정한다. 혹은 스스로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자연상태의 인간의 본능이 남아있어 외부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서 결국 외도를 했을 때 A는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겠는가. 완벽함을 전제로 혹은 특정한 인간으로 자신을 정의 내리고 있었기에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흠결이 가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에 언급했던 것 처럼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라며 단순 실수로 자신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크다.
B는 스스로의 한계와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유혹의 상황이 왔을 때 대처해야하는 지 좀 더 성찰을 많이 해봤을 것이다. B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본질을 인정하고 성찰해본 사람들일 수록 그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혼돈과 카오스인 자연의 상태에 인류는 질서를 부여하고 규율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그 질서와 규율에 적응을 한다.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교도소와 병원처럼 준비된 시스템도 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질서와 규율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착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인간과 세상의 본질은 혼돈에 더 가깝다.
앞서서도 설명했듯 질서와 규율이 없이 막 살자는 뜻이 아니다. 이상향을 추구하며 살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변명거리를 찾는 것보다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심연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심연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방법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사생활의 자유라는 기본권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이러한 인간의 심연을 인정하고 보장하기 위한 권리이다. 누구에게나 심연은 있다. 자신에게 심연이 있음을 부정하거나 타인에게 심연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래서 어리석다. 교육에서 예체능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본능 - 소리지르기, 뛰기, 그리기 -을 펼칠 수 있는 여러 공간 중 하나가 예체능 활동이기 때문이다.
누가봐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심연은 있고 억제된 동물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이라면 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심연을 어떻게 잘 관리해야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다. 당신에게는 정말 남아있는 심연이 하나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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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심연 사이: 인간의 본성과 자기인식에 대하여
국회의원이 성추행 혐의로 논란에 휘말린 후 사과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 있다.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제 주변 모든 분들이 아실 겁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자기방어가 아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장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긍정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한 실수는 일시적인 예외로 취급하고, 타인의 실수는 그 사람의 본질로 단정지어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순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상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현실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심리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해왔다. 공자는 '군자'라는 개념을 통해 도덕적 이상을 제시했고, 플라톤은 '철인'을 통해 이성적이고 완성된 인간의 모델을 제안했다. 교육 제도는 대부분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아이들에게는 더 성숙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보다 방향성에 가깝다. 실제 인간의 본성과 세계는 결코 질서정연하지 않다. 심리학과 물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은 인간과 자연이 본질적으로 '혼돈'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아이는 처음부터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생명은 통제되지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고, 인간의 본능은 때로 비이성적이며 충동적이다. 우리가 '잘 사회화된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교육과 문화, 억제의 산물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질서에 있지 않음을 방증한다. 그렇기에 완벽한 인간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환상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외도를 예로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도를 비난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다르게 판단한다. A는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외도 같은 건 하지 않아." 반면 B는 말한다. "나도 외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어. 그래서 왜 그런 유혹에 빠지면 안 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있다." B는 스스로의 한계와 본능을 인정하고, 이를 다루기 위한 지적 훈련을 시도한다. 그에 비해 A는 자신의 완벽함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만약 외도를 하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할까 두려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인의 자기방어와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인간의 본성은 억제되지 않은 심연에 가깝다. 이러한 심연은 부정하거나 억압할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다루어야 할 본질이다. 사회는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규율과 법을 만들었고, 우리는 이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질서가 곧 인간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완벽한 인간상을 상정하고, 자신과 타인을 이 기준에 억지로 맞추려 한다. 이런 시도는 결국 인간성을 왜곡시키고,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려는 집착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성찰하는 태도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감춰진 욕망과 본능, 즉 심연이 있다. 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더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술과 체육 교육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체능 활동은 억제된 본능을 건강하게 분출할 수 있는 통로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이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간 내면의 심연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교육이 단순히 이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심연을 가진 존재이며, 그것을 인정하고 다루는 방식에 따라 인간의 성숙도는 갈린다. 진짜 강한 사람은 자신 안의 어두움을 모른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다. 완벽한 인간이 되려 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자신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며 성숙한 삶의 태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심연을 품은 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