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상상된 공동체(4)

써머23 2024. 11. 2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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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마지막 물결

1차 대전으로 왕조주의는 종말을 고했으며, 그 자리를 민족국가가 대체했다. 2차대전 이후 신생국가들의 경우 상당 수가 유럽어를 국가 언어를 갖게 되었는데 이 점은 아메리카 모델을 닮았으며 또한 인민주의와 관제 민족주의의 성격을 모두 보여준다. 유럽어 자체가 제국주의적 관제민족주의의 유산이었기 때문에 대중매체, 행정, 교육체계 등을 통해 빠르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었다. 

 

아메리카에서 크리올 관리들의 상향 이동을 제한한 것이 그들의 민족의식에 불을 지폈던 것처럼, 20세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갈색이나 검은 피부의 잉글랜드인이 본국에서 교육이나 훈련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그가 결국 발령받을 수 있는 행정 도시는 랑군, 아크라, 조지타운, 콜롬보(식민지 주요도시)였다. 이렇게 본국과 자국을 오가면서 이중어를 쓰는 집단들은 비슷한 처지의 여행 동반자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이 식민지의 민족국가 의식을 깨우는 게 일조했다. 또한 20세기의 여행은 소수의 여행자들만 하지 않고 발달된 교통 등으로 인해 다양한 군중들이 경험할 수 있었고, 식민지의 관료제 규모가 점점 커짐에 따라 현지인들(이중 언어 사용이 가능한)을 고용함에 따라 순례자 무리는 점점 커져갔다. 또한 근대식 교육의 보급(저자는 이를 도덕적 중요성에서 이뤄진 결과로 묘사한다)은 이러한 식민지의 인텔리 무리들의 집단들을 커지게 했고 이들이 식민지 민족주의 흥기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의 이중 언어 구사능력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 이기도 했다)

 

여기에 제국의 관제 민족주의 가 낳은 역설이 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민족사'로 여겨지고 그렇게 서술하는 것이  식민지화된 식민지인들의 의식에도 결국 전달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 베트남 젊은이들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을, 영국 제국의 일원들은 마그나카르타와 명예혁명을 알 수 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그나카르타 당시 존 플랜태저넷에게 서명을 강요했던 귀족들은 '영어'로 말하지 않았고 자신이 '잉글랜드인'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으나 700년 이후 연합왕국의 교실들에서는 이들을 초기 '애국자'라고 확고히 정의한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후대에 철저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하고 제단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는 청년이 민족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유럽의 본국들과 달리 그들은 유럽식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좁은 말라카 해협 건너편에 있는 말레이 반도 서부 연안의 주민들과 종족적으로 과련되어 있고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반면 수마트라 동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암본 사람들과는 모어도 종족성도 공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본인들은 인도네시아 동포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유대를 자라나게 한 것이 바타비아의 정권이 세운 학교들 이었다. 관료제와 동형을 이루는 학교는 중앙화된 계서제를 형성했으며 동일한 교과서, 표준화된 졸업증서 및 교원 자격증 등을 통해 그 자체로서 일관되고 완결된 경험의 우주를 창조했다. 초등학교는 소읍에, 중고등학교는 더 큰 도시에 그 상위의 고등교육기관은 수도인 바타비아에 설립되었다. 학교 체계는 더 오래된 관리들의 여행에 비견할 만한 순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든 간에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셈을 했다는 사실은 동지의식을 만들어냈고, 급우들의 억양이나 골상에 의해 매일 확인되는 영토적으로 특정한 상상된 실재성이 등장했다. (동지의식을 느낀 동지들의 억양이나 그들의 얼굴에 의해 그들의 출신지역들 전체를 경계로 이루는 범위에 대한 단일성, 혹은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는 의미로 추정됨) 그들은 모두 인란더라 불리며 네덜란드 본국인들과 구분되는 열등함의 속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또한 메이지유신에 경외심을 느낀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내 일본인들을 1899년부터 명예유럽인으로 승격시키면서 인란더는 다른 아시아 인들과도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때가 익어 애벌레의 껍질을 벗고 '인도네시아인'이라는 나비로 탈바꿈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사례처럼 '원주민' 거주지가 불변하는 경계로 작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그 정반대를 보여준다. 오늘날 기니, 말리,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등등의 총명한 학생들은 다카르의 윌리앙 퐁티에 모여들었다. 다카르에서 종결되는 순례는 처음에는 '범서아프리카'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점차 더 많은 학교들이 다른 지역에 설립되면서 소년들은 먼 순례길을 떠날 필요가 없어졌고, 다카르에는 교육의 중심성만 있었지 행정적 중심성이라는 짝이 없었다. 결국 윌리앙 퐁티의 교정을 거니는 소년들의 호환성(친밀감)은 나중에 식민지 행정에서의 관료적 치환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동지애나 연대감은 가졌지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기니나 말리의 민족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각 출신 지역별로 분리됨)

 

식민지배자들이 추구한 교육정책은 인도차이나인 의식 성장에 기여했다. 물론 그 의도가 순수하지는 않았는데 프랑스인들이 크메르(캄보디아)인 승려들과 학생들을 태국의 궤도에서 이탈시켜 인도차이나의 궤도로 끌어오고자 혁신학교를 실험한 것은과거 이들과 신성한 언어(소승불교의 의식과 제도)를 공유하고 있던 태국과의 유대가 강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동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중국 문명과의 격리를 위해(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식 관료제를 통해 통치해왔고, 유교 고전에 대한 필기시험을 통해 관료를 충원해왔다) 유교식 시험을 폐지시켰으며 프랑스 식민지 교육 체계를 통해서만 공무원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과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안된 로마자화된 표기법 '꾸옥응우'가 의식적으로 장려되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세대가 왕조의 기록과 고대 문학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토착적 과거와의 고리를 끊으려는 의도가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교육정책의 목표는 믿음직하며, 은혜를 알고, 문화적으로 동화된 토착 엘리트를 육성해 식민지의 관료제와 대규모 영리사업체의 하위직급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 피라미드 체계의 핵심적 특성은 계급의 상단부가 전부 동쪽에만 이었다는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유일한 대학은 하노이에 있었다. 이 상단부에 오르는 이들은 베트남어, 중국어, 크메르어, 라오어 사용자들을 포함했고 위치적 수렴을 통해 '인도차이나인됨'이 형성될 듯도 했으나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트남 엘리트 계층의 성원들은 자식들을 최고의 프랑스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경쟁했는데 이 자리가 응당 본국인이라 여긴 프랑스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프랑스는 꾸옥응우를 쓰는(이를 통해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별도의 하급 교육  기관을 만들어냈고, 수십만부의 꾸옥응우 교본을 펴냄을 통해 이 표기법의 보급이 가속되어 1920년에서 45년 사이 의도치 않게 이 꾸옥응우가 베트남인들의 결속을 표현하는 매개물로 작동했다. 1930년대 말까지 베트남어 사용인구의 10%만 이 문자를 해독했다고 해도 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비율이었고, 이 문자의 해독가능한 식자층은 그들 집단의 규모를 늘리는데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이 정책은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어를 모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작용을 했다. 크메르(캄보디아)의 경우 프랑스-크메르 초등학교를 허용하려는 식민 정권의 의사와 결합하여 인도차이나의 행정수도(사이공)에서 고등교육을 희망하는 크메르 젊은 이들을 프놈펜(캄보디아의 수도)으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1935년 프놈펜의 시소와스 콜레주가 정식 국립 리세로 승급하면서 사이공과 하노이에 있던 리세들과 동등한 지위 및 교과 과정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의 교육 순례와 행정 순례 사이에는 동형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인들이 믿을만하지 않더라도 크메르인이나 라오인에 비하면 더 정력적이고 지적이라는 견해를 대놓고 표현했고 이에 따라 서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관리들을 대규모로 기용했다. 그리하여 크메르인과 라오인은 사이공과 하노이에 있는 학교에서 베트남인들과 나란히 앉아 있을수는 있으되, 사이공이나 하노이에서 행정 관청을 같이 쓸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모순들로부터 캄보디아의 민족주의의 아버지 '손 응옥 탄'이 등장했다. 또한 시스와스 유테봉 왕자는 사이공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음에도 2차대전이 끝나고 프놈펜으로 돌아왔을 때는 크메르 민주당의 창당을 돕고 46~47년까지 총리직을 맡았다. '이어으 크'는 크메르 문자 타자기 키보드를 고안하고 '피어사 크메르'라는 크메르어관련 문헌 책을 펴냈는데 이 것이 인도차이나에서 독립된 크메르의 민족성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47년 즈음에 크메르어 사용자들은 더 이상 하노이나 사이공에서 수업을 듣지 않았다. 

 

195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인도네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종족반란의 홍수가 일어났음에도 '인도네시아'는 살아남았다. 바타비아가 마지막까지 교육의 정점으로 남아 있었고, 교육받은 각 종족들을 그들의 출신지로 고립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역의 지배자였던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언어를 식민인들에게 전파하는데 무심했는데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 섬들사이의 링구아 프랑카(서로다른 모어를 가진 이들의 소통을 위한 제3의 언어로 행정 말레이어)를 기반으로 국가언어가 진화하였다. 인쇄 자본주의의 발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언어는 시장과 언론에 진출하면서 결국 공식 인도네시아어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민족됨의 상징으로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된 공동체를 창조해낼 수 있는 역량, 즉 특정한 결속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다. - 언어는 배제의 도구가 아니라 포괄의 도구이다.  모잠비크의 포르투갈어나 인도의 영어같은 언어에서 보듯 행정체계와 교육체계가 이중언어 사용을 확산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 기술, 특히 라디오와  TV의 진보는 인쇄물에게 한 세기 전에는 없었던 동맹군을 선사했다. 다언어 방송은 문맹과 모어가 다른 인구 집단들에게 상상된 공동체를 소환해 낼 수 있다.(시각적 표상과 이중언어 사용 식자층을 통해 중세 기독교 세계가 소환되던 것과 닮은 점들이 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관제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여 의식적으로 민간과 군대의 교육체계를, 19세기 유럽의 인민 민족주의를 모델로 하여 선거와 정당 조직, 문화 축제를, 아메리카 식민지를 모델로 하여 시민공화주의라는 관념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민족들이 이제 언어적 공통성 없어도 상상될 수 있는데(인도로부터 분리된 파키스탄의 사례) 결국 순롓길이 막혀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경우 민족주의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최초의 스위스 민족주의는 1798년 프랑스 점령에 의해 강제로 생겨난 헬베티아 공화국의 업적(시민권과 남성보통선거권도입, 내부관세철폐 등)이었다. 스위스는 그 지역 특성상 다양한 독일어 개별어 사용자들, 이탈리아어 사용자들과 프랑스어 사용자들을 포함했고, 2차대전 시기까지 시골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난한 나라였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균열이 훨씬 더 현저했다는 점(구교와 신교의 갈등)에서 민족주의의 발전이 늦어졌다. (인구 대다수가 이동이 불가능한 농민층이었다)  1848년이 지나서야 언어가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고 표준화된 교육시스템을 통해 이중언어 사용자들이 등장하면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다.(이중언어 사용자들이 단일언어 사용자들 위에 걸터앉은 상황) 독일어 사용자가 73%라는 점에서 왜 독일화 되지 않았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독일화는 정치적 위험부담이 명백했고 이로인해 중립이라는 가치를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스위스의 민족의식형성은 언어적 단일성이 필요 없는 방식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쇄의 보급으로 인해 유럽에서 인민적인 일상어를 기초로 하는 민족주의가 창조되었고 이는 왕조의 원리를 침식하는 것이었기에 왕조들은 민족주의에 자체 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유럽 바깥의 식민지에서는 편의상 '러시아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낳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 중심의 표준화된 학교체제와 행정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국가와 기업 관료제에 필요한 하급 간부들을 생산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각 식민지에서는 그 식민지 수도를 로마로 삼는 교육 순례들을 창조했다. 이 순례들은 행정 분야에서 병행되거나 복제되어 연동되었고 이 것이 토착민들이 그들 자신을 '국민'으로 여기는 상상된 공동체의 영토적 기초를 제공했다. 식민지 국가의 팽창이 토착민들을 학교와 사무실로 초대했으나 그들을 본국의 이사회 회의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중언어 구사인텔리들은 고립되었고 그들은 본국으로부터 분리된 토착민들 내부의 상상된 공동체 창조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가 신체적 지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변모시킴에 따라 인텔리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읽는 비문맹 대중에게조차 상상된 공동체를 퍼트릴 방법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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