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상상된 공동체 (5)

써머23 2024. 12. 1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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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인종주의와 애국주의

상상으로 발명된 민족에 왜 사람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애정을 가질까? 자연적인 모든 것에는 언제나 선택가능성이 배제된다. 피부색과, 성별, 부모 태어난 시대 등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자연적 유대에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심 없음의 후광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사람들 대부분에게 민족의 골자는 그들의 이익과 무관하지만 그 이유로 민족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떠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희생보다 이렇듯 불가항력적으로 소속된 집단에 대한 희생이 보다 장엄하고 순수한 것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각각의 언어는 감지될 수 없는 저 먼 과거로부터 불거져 나오며, 현대사회 모든 것들을 넘어선 지점에 뿌리를 둔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언어는 그 무엇보다 죽은자들과 현재의 우리를 잘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또한 시와 노래라는 형식에 담겨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에게 자아를 떠나 그 언어집단으로의 강한 소속감을 안긴다. 

 

네언은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민족주의에서 도출된 것이며 파시즘이야말로 민족주의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라고 주장했으나 기본적으로 인종주의는 오히려 민족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눈꼬리가 올라간'의 줄임말인 '슬랜트'같은 단어는 적수를 생물학적 골상으로 환원함으로써 민족됨을 제거한다. 인종주의의 기원은 사실 민족 이데올로기보다 지배자들의 신성성과 '푸른 피', '하얀 피'에 대한 주장 및 귀족 가문간의 교배에 두고 있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외국과의 전쟁보다 오히려 국내적 탄압과 지배를 정당화 했다.         

 

 

9장. 역사의 천사

영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혁명의 경험은 독특한 것으로 남았다. 영국의 성공 뒤의 확장된 세계에 두 번째로 들어선 후발 부르주아 사회들은 이러한 성공을 동일하게 반복할 수는 없었고 연구와 모방을 통해 다른 현상들을 발생시켰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쌍둥이 개념, 즉 혁명과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나 특허권을 보전하기 힘든 발명품이기에, 해적판을 통해 이상현상이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적의미에서의 당, 즉 체계적인 강령을 실행하려는 사람들이 만들거나 이끈 것이 아니었다는 홉스봄의 관찰처럼 그 자체는 계획적이 아니었으나, 인쇄자본주의 덕분에 이러한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널리 전파되었고, 모듈식 이론화와 실험을 토대로 한 계획적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체계적인 강령과 계획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그 보다 더 뒤떨어진 사회들에서 혁명을 상상할 수 있게 했고 그 모델은 모든 20세기 혁명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마오는 그 실험들이 유럽 바깥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확증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18세기 말부터 민족주의는 정치,경제,사회 등에서 변조와 각색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상상된 공동체는 모든 현대사회에 보급되었고 이는 캄보디아나 베트남과 같은 저개발 국가에게도 전파된다. 베트남이라는 이름은 원래 월나라 남쪽이라는 뜻으로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영토권 주장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을 오늘날 베트남인들이 자랑스럽게지키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민족주의가 지닌 상상력의 힘을 상기시킨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혁명 계획하기'와 '민족 상상하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다양한 혁명 사례들을 통해 취사선택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혁명은 좀 더 용이해졌다. 이는 민족주의에도 해당된다. 관제민족주의는 애초부터 왕조의 이익을 보전하는데 밀접하게 관련된 자기보호적 정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주의가 가진 하나의 끈질긴 특징은 그것이 관제라는 것, 즉 국가의 이익에 최우선으로 복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국가에 대한 통제를 성공적으로 확보한 순간, 관제 민족주의 모델은 그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본이 된다. 토로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 수도는 옛 차르 지배의 중심인 모스크바였고, 중국의 수도는 만주 왕조의 수도였다. 혁명 지도부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과거의 유산을 상속받고 그들의 자리를 대체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관제 민족주의가 사회주의 혁명 지도부의 리더십에 포함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들 스스로가 '국민'이 된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간 전쟁은 그래서 오묘하다. 인민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왜 싸우게 됐는 지는 관제 민족주의적 요소가 그들에게 이미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이분적인 판단은 유용하지 않다.       

 

10장. 센서스 지도 박물관

세가지 제도인 센서스, 지도, 박물관은 식민지 국가가 그 지배권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통치하는 인간들의 본성,  영토의 지리학, 그 유래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했다.(인간들의 본성, 영토의 지리학 등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뜻)

 

1. 센서스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인 센서스는 일정한 기준없이 끊임없이 변동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가 흘러갈수록 센서스의 범주가 더 배타적으로 인종적인 것이 되어갔으며 종교적 정체성은 자취를 감추었다. 1911년 말레이연방국의 센서스는 인종별 말레이 인구라는 항목을 통해 말레이인, 자바인, 사카이인, 반자르인 등으로 나열해 놓았다. 이 중 말레이인, 사카이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웃인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였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들 자신을 이러한 꼬리표로 인식하지는 않았다.(이러한 정체성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행정적 침투가 있어야 했다) 

 

이베리아인 성직자 정복자들이 모험을 벌인 섬 어디서든,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그들이 도착한 세계의 사회를 자신들의 사회적 분류체계와 유사한 신분으로 유추해냈다.  동인도 회사는 살인사건의 피고인 치레본 궁정의 고위관리를 '중국인'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아는 그들이 초대양적인 눈을 통해 스페인 정복자들의 끝없는 연쇄를 보았든 중국인의 끝없는 연쇄를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1870년대 센서스 실시자들은 계량화를 통해 혁신을 이루어낸다. 말레이자바세계의 지배자들은 징세와 징병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만 기록해두었으나, 1850년 이후 식민지 당국은 미로같은 모눈에 따라 주민들을 열거하는데 정교한 행정적 수단을 사용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포함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긴 연쇄 속에 있는 하나의 숫자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인구학적 지형도는 식민지 국가가 크기와 기능을 배가해 감에 따라 제도적 뿌리를 깊게 내렸다. 이렇듯 센서스라는 상상된 제도적 길잡이를 따라 국가는 종족적 인종적 계서제라는 원칙위에 관료제를 조직했다. 새로운 교육, 사법, 보건, 경찰, 이민국, 학교, 진료소의 그물망을 지나가는 예속 주민들의 삶은 국가가 만들어낸 환상에 실재하는 사회적 삶을 부여하는 습관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새로운 체계에 물론 불쾌한 현실도 발생했는데 대표적인게 국가의 권위주의적 모눈 지도에 정렬하지 않던 종교 공동체였다. 특히 센서스가 아니라 민중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접근 여부가 달려있었던 종교적 사당과 학교 법원은 계속 번영했다. 국가는 이들을 규제하고 표준화하여 자신들의 제도에 계서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사원과 모스크 학교와 법원이 나중에는 민족주의적인 반식민주의자들이 출격하는 요새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지도 

도시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각화 되고 있었다. 더이상 메카는 신성한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잇장 위의 점이기도 했고, 차별을 두지 않고 찍혀있는 범속한 점들과 신성한 점들 사이의 평면적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직선 거리일 뿐이었다. 태국의 역사가 통차이는 1850년~1910년 사이에 국경을 갖춘 시암이 태어나게 된 복잡한 과정을 추적한다. 태국 사례에서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출현을 대단히 선명하게 볼 수 있다. 1851년 라마4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시암에는 천상의 극락들과 지하의 지옥들의 연쇄가 단일한 수직적 축을 따라 가시적 세계에 박혀있는 형태의 지도와, 군사작전과 해안 수송을 위한 도해적 길잡이형 지도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도들은 결코 더 넓은 지리적 맥락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들에게 조감도란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근대적 지도의 출현은 국제적 경계에 주권이 행사되는 한계를 결정하며, 각 정치적 지역들의 공간적 형태를 정의한다는 중요성이있다.)

 

과거에 경계석과 같은 표지들이 존재했으나 이는 수평적으로 사람 눈높이에서 이해되었을 뿐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은 아니었다. 1870년에야 태국의 지도자들은 경계가 배타적인 주권체를 구별하는 역할을 함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1900년 무렵  WG 존슨의 '시암의 지리'가 출판되면서 인쇄자본주의와 지도들은 공간적 현실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태국 정치의 어휘에 즉각적인 효과를 끼쳤다. 행성 전체의 구부러진 표면은 텅 빈 바다와 탐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들을 측정한 기하학적인 모눈에 종속되었다. 센서스 기획자들이 사람들에게 부과하려는 것과 똑같은 감시의 공간을 지도가 제공했다. 전쟁과 조약이 반복되면서 지도와 권력의 제휴는 진전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상식의 관점에서 보면 지도란 실재의 과학적 추상화이다. 지도는 그저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표상할 뿐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이 관계는 역전된다. 지도가 공간적 실재를 미리 예견한다. 즉 지도가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갈 실재를 위한 모델이 되는 샘이다. 이제 지도는 새로운 행정체계와 병력이 그들의 권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꼭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지도와 센서스는 상호작용을 하는데, 지도는 센서스 기구가 소환해 낸 각 부족의 흐릿한 경계를, 정치적 목적에 따르면 어디에서 그들의 경계가 끝나는 지 영토적으로 제한함으로써 단호히 끊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20세기 동남아시아의 관제 민족주의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출연하는데 그 중 하나는 주권을 '상속' 받는 것이다. 이는 네덜란드 침략자들이 자신들의 세계에서 확립된 법적 상속권과 양도권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토착인들의 주권을 '상속'받았다 여긴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은 새 소유지의 소유권사를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특정 영토 단위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지도학적 담론으로 내보이기 위해 '역사 지도'들이 나타난다. 연대기적으로 정리된 그러한 일련의 지도를 통해 영지에 정치적 내러티브가 부여된 것이며 이는 식민지 국가의 상속자가 된 민족국가들에 의해 채택된다. 

 

또 다른 사례른 로고(logo)로서의 지도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의 영역을 특정한 색으로 표현한 것에서 비롯된 이 특징은, 특정 지정학적 공간을 지리적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 시켜 순수한 기호로서의 역할을 하게 했다.(여행을 위한 길잡이로서의 기능이 거세된) 이러한 로고지도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깊이 침투해 특정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특정 민족에게 부여하게끔 하는 사고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는 인도네시아 였다. 1828년에 네덜란드인들은 최초로 뉴기니섬에 정착지를 마련했으며 이후 1901년에는 서부 뉴기니섬을 네덜란드령 인도에 병합했다. 이 중 뉴기니의 남동쪽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지역에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을 가두는 수감시설이 입지로 선택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현지 주민들이 민족주의적 사고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들이 이 곳에 수용되면서 서부 뉴기니는 반식민지 투쟁을 위한 민족적 상상의 성지가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는 네덜란드의 로고지도가 그들의 상상된 유대를 강화했다는 사실이 숨겨져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 지역을 62의 나이에 처음으로 방문하여 이 지역 주민들을 '형제자매들'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 뉴기니 주민들은 인도네시아의 여타지역에 대해 큰 이질감을 느꼈다 - 바위투성이와 외진 지형으로 인해 뉴기니섬안에만 200가지 이상의 언어와 다양한 종족이 존재했다.

 

3. 박물관

박물관화는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우선 박물관을 가능하게 했던 고고학에 대해 고찰해보자. 식민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예속시킨 문명들의 고대유적들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점점 고대의 유적들을 파헤치고 너비와 길이를 재고, 사진을 찍고, 울타리를 치고 분석하는 전시과정이 이어졌다. 점점 유적의 복원에 고고학적 노력이 매우 강하게 집중되었는데 그 세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고고학적 노력이 집중되던 시기가 교육 정책을 놓고 벌어진 정치적 투쟁의 시기와 들어맞았다. 학교 교육에 대규모 투자를 촉구하는 토착 '진보파'와 이에 대응해 학교 교육의 장기적 결과를 두려워하며 토착민들이 토착 그대로 남길 선호하던 보수파가 대립했는데, 국가가 후원하는 전통 문학 텍스트의 활자본으로 이어지게 될 고고학적 복원은 보수적인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진보파의 압력에 저항하는 핑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두번째로 1930년대 까지 토착민들과 유럽대륙인은 같은 인종이 아니라는 생각이 인기를 끌었는데,  식민지 지배자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현재의 토착민들이 더 이상 그들의 추정상의 선조가 이룬 것을 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위대함이나 자치의 역량이 없다는 것을, 없게 된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활용된 것이다. 세번째이유는 식민지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견된 전통의 수호자로서의 입지를 설정하는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박물관화된 유적들은 세속 식민지 국가의 휘장으로서 재배치 된다. 유적과 보물들은 신성성을 잃고 이제 복제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기능적 역할이 주어진다. 이렇듯 고고학은 심원하게 정치적이었음에도 토착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독립 이후에도 국가들은 이러한 정치적 박물관화를 이어받았는데 각 유적지와 문화재는 정권과 국가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문화재와 유적지는 나라에 대한 시각적인 표상으로 활용되며, 상업 예술 스타일로 어디서나 감상가능한 형태로 배포되어 소비되며 결국 대중적인 표상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즉 문화재와 유적지는 민족 정체성의 기호로써 기능한다. 

 

센서스와 지도 박물간은 지배 영역에 대한 식민지 국가의 사고방식을 조명한다. 즉 어떤 것이든 끝없이 분류하여 재생산 가능한 복수형의 것들로 파헤치는 점인데, 개별적인 것은 언제나 어떤 연쇄의 잠정적인 대표이게 된다. 이러한 사고를 통해 인간의 풍경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서 창조하고, 개별의 존재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함으로써 동질적 존재로 분류한다. 식민지 국가가 지역에 따라 임의적 상상으로 부여한 지역인들에 대한 분류는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쳐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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