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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자연과학의 발흥

by 써머23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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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은 단순한 한 제국의 종말에 그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서유럽으로 피난한 수많은 비잔틴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원전, 특히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전통을 함께 들여왔고,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반을 깊이 있게 전환시켰다. 이때의 고대철학의 재발견은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과 독특하게 결합하여 새로운 사유 지형을 형성하였다.

 

 중세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실재론과 신학적 논증 구조에 기반한 체계였다. 하지만 14세기부터 전개된 유명론의 대두—특히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의 영향 아래—존재론의 중심이 보편자에서 개별자로 옮겨갔고, 이는 관념보다는 구체적 사물과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유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실험과학의 발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개념보다는 관측 가능한 실재, 보편보다는 구체적인 경험, 이성보다는 감각자료의 처리에 대한 관심은 근대 과학의 핵심 토대 중 하나였다.

 

 이와 동시에 고대 그리스 철학의 수리적 전통—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주의—은 자연 세계를 수학적 구조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자극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를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불가분의 입자들'로 파악하였고, 이는 훗날 기계론적 자연관의 철학적 전거가 되었으며, 신플라톤주의는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수에 기반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전통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를 비롯한 초기 과학혁명기의 주요 인물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시대는 단순히 고전을 복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고대 그리스는 이론은 발전시켰지만 자연을 조작하거나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였다.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실천적 열망이 이론적 사유와 결합하면서 근대 과학의 토양이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에는 뉴턴에 의해 고전역학이라는 실험적이고 수학적인 자연과학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이는 신학과 철학만이 '진리'를 다룬다는 기존의 구도를 깨뜨리고, 과학을 새로운 인식 주체로 등장시켰다. 이 시기 철학자들—데카르트, 로크, 흄, 그리고 칸트에 이르기까지—는 과학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주력했으며,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반성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였다.

 

 결과적으로 서구의 자연과학은 그리스 철학의 수학주의, 중세의 논리적 체계, 유명론의 개체 중심 사유, 그리고 르네상스적 실천정신이 중첩되며 형성되었다. 자연은 더 이상 신의 신비로움이나 주술의 대상이 아니라, 수학적 언어로 서술 가능한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모델, 양적 추론, 그리고 실험이라는 과학의 핵심 방법론이 확립되었다.

 

2. 가설연역법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중세를 지배했던 스콜라철학의 연역법적 방식은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연역법은 이미 전제된 명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그 전제 안에 결론이 포함되어 있어 새로운 지식을 산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는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점점 큰 문제로 다가왔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귀납법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귀납법은 개별적인 사실들을 관찰하고 축적하여 일반화된 명제를 도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의 대표적 사상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그는 과학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경험과 관찰을 통해 진리를 점진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례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귀납법은 본질적으로 확증적이지 않으며 오직 반증 가능성만을 지닌다. 이러한 한계는 과학이 오직 귀납적 방법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연역법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귀납법과 연역법의 결합을 통해 '가설-연역법'이 탄생하였다. 이 방법은 먼저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참일 경우 관찰될 수밖에 없는 명제들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며, 이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 명제들을 검증하는 절차를 따른다. 만약 실험 결과가 가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가설은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론은 미래의 관찰과 실험에 의해 반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은 이러한 가설 제시와 연역, 관찰과 실험의 반복을 통해 나선형으로 축적된다.

 

 이처럼 가설-연역법은 자연의 과정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식을 가능하게 하며, 이론과 실천적 적용이 하나로 융합되는 지점을 마련한다. 고전역학이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면서 과학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을 때, 그 개념들에 매료된 철학자들이 등장했듯이, 이 방법 자체에 주목한 철학자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영국의 경험주의자들—로크, 버클리, 흄—은 경험을 통해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중시했으며, 대조적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연역법과 수학을 진정한 지식의 도구로 보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는 고전적 철학이 말하는 변치 않는 이상국가와는 다른 관점으로, 변화하고 진보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베이컨에게 있어 사회의 목적은 더 이상 저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실천적 개선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핵심 가치로 보았고, 이 능력을 기반으로 인류가 자율성과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을 제시했다.

 

 또한 베이컨은 인간 지성의 오류를 네 가지 선입견—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으로 분류하였다. 그 중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 희망하는 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성향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선입견을 극복함으로써 인류가 보다 건전하고 참된 인식을 통해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과학적 방법론의 성립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 과학이론의 핵심적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과학이 단지 자연을 설명하는 학문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진보와 인간의 해방에 기여하는 철학적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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