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개량한 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관측하며 중세의 전통적인 우주관에 도전했다. 그는 달 표면에서 산과 계곡을 관찰함으로써, 달이 완전하고 매끄러운 구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믿음을 반박하였다. 또한, 금성이 달처럼 위상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을 관측함으로써, 금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는 지구 또한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목성 주위를 공전하는 네 개의 위성(오늘날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리는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을 발견하고, 태양의 흑점과 표면의 격렬한 활동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발견들은, 천상의 세계는 완전하고 변화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전통의 핵심 전제를 무너뜨렸다. 즉, 하늘의 천체들 역시 불완전성과 변화를 지니고 있으며, 지상계와 천상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이론적으로 우아했으나, 일상 경험과 감각적 직관에 반하여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인간은 지구의 운동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하늘이 움직인다는 지구중심설은 여전히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고수하는 것이 단순한 무지의 결과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갈릴레이는 커다란 논쟁에 휘말렸다. 성서의 ‘여호수아서’에서는 하느님이 해의 움직임을 멈추는 기적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교회가 지구 중심 우주관을 지지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이에 대해 갈릴레이는 성서의 언어는 철학적·과학적 진리를 직접적으로 진술하기보다는, 대중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표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는 성서 해석보다 더 직접적인 진리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고, 성서 해석 또한 자연의 관찰 결과에 조응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입장은 신학자들의 성서 해석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재판에서 지동설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고 수용했으나, 이후에도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라는 저술을 통해, 대화 형식을 빌려 지동설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 주장하였다. 이 저서는 교회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과학사에서 중대한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다.
갈릴레이는 물체의 낙하운동의 법칙과 관성의 법칙을 발견한 인물로, 물리학의 근대적 전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경험주의자라기보다는 합리주의자에 가까웠다. 비록 물리학이 일상 경험에 가까워져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플라톤처럼 그는 감각 경험보다 이성과 수학의 우위를 강조했다.
갈릴레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즉, 위계가 존재하고 각 사물은 자연적 목적에 따라 특정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고 방식—의 해체였다. 그에게 있어 우주는 더 이상 위계적 질서 속에 있는 정태적 구조가 아니라, 수학적 법칙에 따라 기술될 수 있는 동역학적 구조였다. 자연은 목적론적 설명이 아니라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분석을 통해 이해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점은 '모든 자연 현상은 동일한 존재론적 차원에 놓여 있으며, 동일한 자연 법칙이 우주 전체에 적용된다'는 원리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아래로 낙하하는 현상을 그 물체의 ‘자연적 자리’를 향한 운동으로 보았고, 우주 내 각 사물은 그 본성에 따라 일정한 위치를 갖는다고 믿었다. 특히 지상계(월하의 세계)와 천상계(월상의 세계)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별개의 질서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천상과 지상을 아우르는 보편적 법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진공 속에서 물체의 운동은 특정한 목적지로 수렴하지 않으며, ‘자연적 자리’라는 개념은 물리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오히려 물체는 외부의 힘이 없다면 일정한 속도로 직선 운동을 지속한다는 관성 법칙에 따라 설명되어야 했다. 이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외부 힘의 작용이 아니라, 그 힘이 제거되었을 때 지속되는 상태'라는 전환을 의미하며, 물리적 설명에서 목적론을 제거하고 수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운동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결국 갈릴레이의 우주는 더 이상 위계적·목적론적 체계가 아니라, 수학적 법칙이 지배하는 균일하고 동질적인 공간이었다. 이러한 전환은 물리학뿐 아니라, 존재론적·인식론적 수준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철저히 해체하는 혁명적 전개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관성의 법칙을 통해, 모든 물체는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 상태를 유지하거나 일정한 직선 운동을 지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완전히 마찰이 제거된 상태에서의 직선 운동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시 누군가는 이러한 법칙에 대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상상에 불과하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이 역시 이러한 운동은 오직 이상화된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학의 개입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수학은 현실 세계의 복잡성과 마찰, 저항 등을 제거한 순수한 이상적 구조를 기술함으로써, 자연의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는 언어가 된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수학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보았으며,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세계의 본질적 실재가 수학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를 통해 수학적 존재론을 옹호하였다.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 속에서도 불변적인 구조, 즉 수학적 관계와 기하학적 형식들이 존재하며, 이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열쇠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갈릴레이를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 철학의 계보 속에 위치시킨다. 자연의 본질은 감각으로 직접 지각되는 표면이 아니라, 지각 가능한 세계의 심층에 놓인 수학적 질서에 있다는 주장이다.
갈릴레이의 자연관은 또한 감각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포함한다. 색, 냄새, 맛과 같은 감각질은 물리적 세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유래된 관점이며, 이후 데카르트와 영국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들은 감각 경험보다는 이성적 인식과 수학적 구조를 통해 실재를 파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순수한 합리주의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는 실제로 수많은 실험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고자 했다. 낙하 운동, 진자 운동, 포물선 운동에 관한 실험들을 통해, 그는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법칙들이 실제 자연 현상을 얼마나 정밀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 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연 현상을 수학적 언어로 서술할 수 있는 토대를 놓았으며, 실험과 수학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강조하였다.
갈릴레이는 특히 기하학을 중시했다. 기하학은 자연을 정량적이고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하며, 이는 실험을 통해 자연 법칙을 도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삶과 동떨어진 이론으로 여겨지던 피타고라스적, 플라톤적 사변이 새로운 실험 과학과 기술 발전에 핵심적 아이디어로 응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즉, 고대 철학의 추상적 통찰이 근대 과학 혁명의 실제적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2. 뉴턴
뉴턴에서 부터 물리학은 본격적인 실험적인 가설 연역적 연구가 시작된다. 그는 입자개념, 진공개념, 그리고 서로 떨어져 있는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역학적 힘의 개념을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그 역시 수학과 기하학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측정을 토대로 선이나 원과 같은 도형을 정확한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방식으로 해명된 운동 개념을 이용하여 자연의 힘들을 연구하고 자연현상들을 설명하였다.
제1법칙 : 관성의 법칙
제2법칙 : 가속도의 법칙
제3법칙 : 작용-반작용의 법칙
뉴턴의 이론은 철학에도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특히 물리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정립하려 했던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시공간을 절대적인 실재로 보지 않고, 인간의 인식을 통해 경험되는 선험적 형식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인과성이나 범주화의 경향 또한 인간 내부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인식의 본질로 간주했다. 이러한 관점은 회의주의적 반론에 대한 강력한 반박이 되었다. 회의주의는 오늘의 원리가 내일에도 동일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확신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선험적 인식 구조는 동일한 인과관계와 범주를 지속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복적이고 안정된 경험을 할 수 있다.
뉴턴을 통해 과학은 진보의 이념과 결합되었다. 과학이 이제 진리 문제에 관한 정당한 권위자로 부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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