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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소피스트와 프로타고라스

by 써머23 2025.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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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피스트

 기원전 450년부터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가 싹트고 사상적으로도 변화가 발생한다. 기존에 자연에 대한 물음(자연철학적시기)에서 벗어나 관심의 대상이 인간과 그의 생각으로 바뀐다. 즉 확실한 지식의 조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의 이행, 즉 인식론으로의 전환이 발생한다. 인간의 생각자체가 생각의 대상이 된 것인데 결국 이는 인간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위치함 의미한다. 이로인해 윤리적-정치적 물음들도 진지하게 제기 된다 - 인간의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문제제기. 

 

 그리스인들은 식민지의 낯선 풍습,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성찰을 해냈으며, 변화속에서도 변화하지 않은 요소에 대해 과거에 질문을 던져왔듯 다양한 관습 속에서도 하나의 보편타당한 도덕성과 정치적 이상을 찾아낼 수 있는 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어떤 이들은 신이나 자연에 의해 주어진 하나의 도덕적 정치적 이상이 존재한다고 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도덕성이란 한 사회 혹은 개인의 창조물이며 보편타당한 도덕성 정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결국 개인적 의견에 대한 판결 기관의 부재는 도덕성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이끈 것이 바로 소피스트 들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던 소피스트들은 저널리스트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었지만 회의론(확실한 지식은 없다)과 상대주의(보편타당한 도덕성이나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치우치는 경향은 분명했다. 그들은 옳거나 정의롭다 칭하는 것들은 임의의 지배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록 강요한 것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즉 권력이 옮음을 만든다. 

 

 cf) 이들이 이렇듯 도덕적 상대주의로 흐른 원인에는 연역적 명제의 입증이 어렵다는 데 있다. 특정 도덕규범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논증의 출발점이 되는 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규범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연쇄적으로 더 상위의 규범을 요구하므로 순환 논리에 빠진다. 게다가 도덕성이나 법적 원리는 지각이나 관찰로서 확정될 수 없다. "철수의 머리는 검다"는 관찰에 의해 확증 혹은 반증되지만, "철수는 심부름을 가야한다"는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없다. 

 

 소피스트들은 결국 합리적 논증의 기술보다는 논쟁의 요령과 속임수를 가르치는 성향이 강해졌고 오늘날의 인식처럼, 사소한 일이나 따지는 궤변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2. 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라는 인식론적 명제로 유명한 그는, 어느 시점에 주어진 인간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사물들이 달리 해석 혹은 다른 측면으로 규정될 수 있음을 설명했다. 망치가 목수에게는 사용도구지만 물리학자에게는 특정한 질량과 부피를 가진 물체로, 상인에게는 특정 시장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해석되는 것 처럼 말이다. 즉 사람의 인식과 상황 자체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를 관점주의 - 지식이 우리의 관점에 의해 기초 지식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 라고도 하는데 사물을 바라보는 다수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다원주의를 함축한다. 따라서 상대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목수의 관점에서 기술한 망치처럼 각자의 관점에서는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상의 현현이 일정한 관점하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 대상이 과연 동일한 것으로 인식이 될 수 있는가? 이는 한 사람이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직장 상사인 것처럼 사물도 다양한 측면을 가질 수 있기에 프로타고라스는 한 사물이 충분히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더 나아가 관점주의를 이론적 토론에 확장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두가지 상반되는 주장이 존대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똑같이 참이면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진술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 명제 자체에도 위 명제의 사실이 적용되는가? 그렇다면 이 명제와 모순되지만 역시 참인 명제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결국 그의 주장은 회의적인 자기 해체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처럼 주어진 시점의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대상이 달리 현현한다면 서로 다른 집단이나 계급에 속한 사람들 간에 상호 이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른 계급,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나이, 다른 성별 간에는 과연 소통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프로타고라스는 집단의 이름으로 규정된 상황이 아닌 개개인이 독자적으로 처한 특별한 상황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현현한다고 본 것인가? 이처럼 그의 관점은 많은 논란과 순환 논리를 포함한다. 또하나의 예를 들자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현현한다."는 주장조차도 특정 개인에게 현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일 수 있다. 

 

 인간의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규범적 문제와 관련된 최종심은 바로 우리 사회라는 것을 함의한다. 가치와 규범은 그 사회에서만 유효하다. 이는 법에 대한 두 가지 견해 대립으로 이어지는 데 현존하는 법이 타당하다는 법실증주의와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만이 타당하다는 자연권 철학이 그것이다.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법실증주의적 경향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보편적 규범에 접근 가능한가, 전통과 전승을 넘어 보편적으로 옳고 참인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그 원인으로 신적인 것은 지각을 넘어선다는 것, 그리고 인생은 짧다는 것을 들었다. 그 역시 도전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은 남겨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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