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체제의 몰락으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중심으로 한 빈체제(보수주의)가 구축된다. 이들은 전통과 역사를 이성과 자유보다 우선시하고 과거로부터 정책의 기조를 구하려 했으며, 나폴레옹에 점령당하며 발발한 에스파냐의 식민지 독립운동 위기에 개입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왕은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구왕정체제의 굳건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1. 그리스의 독립 투쟁
나폴레옹 체제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는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할 자유 국민국가의 건설을 염원했다. 러시아는 지중해 진출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신성 동맹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리스의 자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결국 그리스는 메테르니히의 반대를 넘어 1829년 3월 독립에 성공한다. 그리스의 독립은 민족 공동체의 과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민족주의적 열망을 고조하는 데 일조했다.
2. 에스파냐 식민지의 자유주의 운동
에스파냐는 나폴레옹에게 패하며 그 힘을 잃어갔고 특히 이는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촉발 시켰다. 1814년 페르난도 7세가 왕좌에 복귀한 뒤 에스파냐 내부에서는 절대왕정의 옹호세력과 인민주권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고, 1820년대 말에 이르러 아메리카 식민지 가운데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만 제외한 식민지들이 모두 독립해서 에스타냐 체제 속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과정속에 국가의 위상은 크게 약해졌고 그 틈을 노려 영국의 아메리카 침투가 활발해졌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독립푸쟁은 페닌술라르(에스파냐 출신 백인)의 지배에 맞선 크리오요(아메리카 태생 백인)의 민족주의적 표출이었다. 멕시코의 경우 원주민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나 봉기가 좌절된 후 반혁명체제가 지속되다가 보수적인 크리오요의 주도로 독립을 이루었다. 누에바그라나다(콜럼비아와 베네주엘라)에서도 크리오요들은 독립 투쟁에 원주민의 적극적인 가담을 견제했다. 이는 독립투쟁의 보수적 속성을 보여준다. 독립 이후 크리오요가 페닌술라르를 대체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립 잡게 된다. 또한 식민 권력의 해체는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각 지역에 근거지를 둔 군벌 전성시대를 열었다. 멕시코의 경우 1821년 독립이래 1860년대 까지 군벌들의 각축전이 잇달아 50여명의 대통령이 난립하는 등 극도의 혼란기를 맞았다. 영국이라는 거대 세력에 맞서기 위해 내부 결집부터 완료한 후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달리, 에스파냐의 내부 정치 상황으로 인해 약간은 어부지리로 독립을 맞이해 내부의 결속을 다질 시간이 없었던 멕시코는 이로 인해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이는 오늘날의 마약 카르텔의 난립으로까지 이어진다.
3. 7월 혁명 등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주창된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입헌 주의 등은 어느 정도 유럽 사회의 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정부의 권력이 절대적이 아니라 제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인민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구성, 헌법에 근거한 정부권력의 제한을 옹호했다.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왕정복고를 시도했던 샤를 10세의 몰락)으로 입헌 왕정을 탄생시켰고, 폴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에서도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온건공화정(보통 선거)를 수립했다. 보통선거제의 도입은 자유주의가 민주적 원칙과 결합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프랑스의 2월 혁명은 중동유럽으로 확산되어 자유주의적 정부와 민족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보수적 성향이 강한 엘리트계층에 의해 이는 무산되었고 자유주의 세력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을 주도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메테르니히가 밀려났지만 헝가리의 봉기는 실패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나 헝가리의 자치권 확립등은 정부가 주도한 정책의 산물이지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결과는 아니었다. 따라서 서유럽과 중동유럽의 간극이 더욱 커지게 된다. 위대한 헬레니즘을 기치로 자유주의의 확산을 막아낸 그리스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지역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를 억제하고 봉쇄하는데 활용되었다.
4. 미국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은 생도맹그(아이티) 흑인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재정적 압박을 받던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미 중부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한다. 이는 서부 팽장의 발판이 되었다. 공장의 설립 확대와 노동자 부족에 시달리던 미 북부의 기업가들은 노예제 폐지를 간절히 원했고, 남부지역의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농장 경영을 위해 노예제 존속을 주장했다. 18521 미주리 대타협을 통해 노예금지주와 노예주의 수적 균형을 이루고 타협안을 지켜왔으나 1854년 네브래스카와 캔자스가 연방 가입을 신청하면서 균형이 붕괴된다. 북위 36도 북쪽에 위치한 두 주는 노예금지주로 가입해야했지만 남부에서는 미주리 대타협을 무시하며 두 주의 주민들의 선택에 맡기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주리 대타협이 붕괴될 무렵 링컨의 주도로 공화당이 재정비 되었다.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노예제 폐지, 연방주의를 기조로한 그의 정책 기조는 노예제, 자유무역, 지방분권을 주장한 남부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보다 연방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여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의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 연방의 통합과 단일한 국가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게 된다.
5. 크림 전쟁
러시아는 지중해 진출을 통해 남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대결한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가 지중해 상권과 패권에 영향을 줄 것이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면서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이어진다. 이 전쟁을 겪으면서 크림반도, 발칸반도, 아라비아 반도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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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빈 체제(1815~1848): 보수질서의 복원과 유럽의 재구성
📌 개요
- 1815년 빈 회의: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 질서를 보수적 왕정 중심으로 재편
- 주도 인물: 메테르니히(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혁명은 악, 전통과 질서가 미덕”이라는 보수주의 철학의 정점
- 주요 조직:
- 신성 동맹(1815):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 기독교 질서 수호
- 4국 동맹 → 5국 동맹(영국 포함): 프랑스 봉쇄와 반혁명 연대
✅ 2. 그리스 독립전쟁(1821–1829): 민족주의 vs 신성 동맹의 균열
📌 배경과 과정
- 1821년: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그리스에서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전쟁 발발
- 그리스는 고대 유럽 문명의 상징으로 지식인들의 낭만적 지지를 받음 (예: 바이런 경, 필헬레니즘 운동)
- 러시아는 정교회 보호와 지중해 진출 명분으로 지원 → 신성 동맹의 내부 균열
📌 결과
- 1827년 나바리노 해전: 영·프·러 연합 함대가 오스만 함대 격파
-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 → 그리스 독립 승인
🇬🇷 이 사건은 보수주의 질서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도전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김
✅ 3.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1810~1830s): 페닌술라르 vs 크리오요
📌 구조
- 페닌술라르: 에스파냐 본국 출신 백인 관료·귀족
- 크리오요: 식민지 출신 백인 부유층 → 주도적 독립 세력
- **원주민과 메스티소(혼혈)**는 배제되거나 수동적 참여
📌 주요 사건
-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 마르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등에서 독립 이끌음
- 멕시코(1821): 원주민 기반의 봉기(이달고 신부)가 실패 → 크리오요 보수파가 독립 주도
📌 결과
- 대부분 1820년대 후반까지 독립
- 정치 공백 → 군벌(카우디요) 중심의 불안정 정국
- 멕시코는 50년간 50명 이상 대통령 → 현대 정치의 기초 취약
⚠️ 영국은 이 틈에 경제적 진출을 가속 → 중남미는 사실상 반(半)식민 경제구조로 편입됨
✅ 4. 1830년대~1848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과 한계
📌 1830년 7월 혁명 (프랑스)
- 샤를 10세의 왕정 복고 시도에 반발 →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즉위 (입헌군주제)
- 영향:
- 벨기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폴란드, 이탈리아: 자유주의 봉기 → 실패
📌 1848년 2월 혁명 (프랑스)
- 보통선거 요구, 경제위기(산업 불황) → 루이 필리프 퇴위
- 제2공화국 수립 → 남성 보통선거 시행
📌 중동유럽으로 확산
-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 실각, 빈 봉기, 헝가리 자치 요구
-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소집 → 전독일 통일 시도 실패
- 이탈리아: 사르데냐 중심 통일 시도 → 오스트리아군에 패배
❗ 대부분은 보수 엘리트의 반격과 농민·노동자 계급과의 연대 부족으로 무산
✅ 5. 미국: 노예제와 연방의 갈등 → 남북전쟁 전야
📌 루이지애나 매입(1803): 영토 확장
- 프랑스는 아이티 봉기(1804) + 대륙전쟁 자금 필요 → 영토 매각
- 미국은 미시시피 강부터 로키산맥 동쪽까지 확보
📌 노예제 문제
- 미주리 타협(1820): 36°30′선 남쪽은 노예 허용, 북쪽은 금지
-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 주민 자결로 변경 → 미주리 타협 붕괴
- 공화당 창당(1854): 링컨 중심의 노예제 폐지·보호무역·연방주의 지향
🔥 이는 결국 **남북전쟁(1861–65)**의 결정적 요인
✅ 6. 크림 전쟁(1853–1856): 동방문제와 국제균형의 시험대
📌 배경
- 러시아는 정교회 보호자 명분 + 흑해 진출 야욕 → 오스만 제국 압박
- 프랑스·영국·사르데냐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며 참전
📌 주요 전투와 결과
- 세바스토폴 공방전, 발라클라바 전투 (전설적 "경기병대의 돌격")
- 1856년 파리 조약:
- 러시아는 흑해에서 군사력 철수
- 오스만의 영토 보존 인정
🌍 이 전쟁은 동유럽 민족주의, 동방문제(이슬람 쇠퇴)의 촉진제가 되었고,
이후 러시아는 농노 해방(1861) 등 내부 개혁을 추진하게 됨
✅ 결론: 1815~1860년대, 보수체제에서 민족국가로의 장기 이행
빈 체제 | 구왕정·보수주의 복원 | 신성동맹·반자유주의적 개입 |
민족주의 | 그리스·라틴아메리카·폴란드 등 | 민족자결 vs 제국 보전 |
자유주의 | 1830, 1848 혁명 | 헌정주의·보통선거·공화주의 확산 |
미국 | 노예제·연방주의 갈등 | 남북전쟁 예고, 국가정체성 확립 |
크림 전쟁 | 러시아 팽창 견제 | 민족주의 열기 고조, 동방문제 심화 |